내가 상상한 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것들과 비교한다면 이것은 뜻밖의 사태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 섬에 대한 나의 생각들은 광고 팸플릿과 비행 시간표를 읽는 가운데 짜 맞추어진 세 가지 고정된 이미지 주위만 맴돌고 있었다. 첫 번째는 석양을 배경으로 야자나무가 서 있는 해변의 이미지였다. 두 번째는 좌우로 열리는 유리문을 통하여 나무 바닥과 하얀 침대가 들여다보이는 호텔 방갈로의 이미지였다. 세 번째는 담청색 하늘의 이미지였다. / 여행의 기술, 알랭드 보통

 
동해는 낯설다. 가본 적이 없는 탓이지만. 왠지 그곳의 느낌은 젊고 열정적이며. 그 사이에 외로움이 묻어난다.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낭만적이다. 그리고 낯설다. 혼자 여행 할 곳으로 동해를 택한 것은 그래서였다. 어느 늦은 금요일 저녁 차를 타고 동해로 내달았다. 그날 저녁은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강의를 했던 날이다. 강의가 끝나고 두툼한(!) 현금 뭉치를 받아들었고, 그 돈만큼만 여행을 하고 싶었다. 돈을 받고 당장 떠나야겠다고 생각한거라 아무런 준비도 못했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싶었고. 그러기에 바다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다다르고 싶었다. 중간 중간 차를 세웠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문득 배가 고파서 주변에 맛집을 찾아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잠을 줄여가며 도착한 동해. 그곳에서 이 장면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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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꾼은 미끼를 쓰지 않았다. 낚시꾼은 대부분의 시간을 낚시대를 들고 바다를 쳐다보기만 했다. 낚시대를 바다에 넣은 것은 내가 지켜본지 거의 10여분이 지난 시점이였다. 미끼를 걸어서 물고기를 유인하는게 아니라, 물고기떼가 지나갈 때 낚시대를 던져서 낚아채는 방식인 듯 했다. 그리고 첫 번째 도전에서 그가 잡은 물고기는 꽤 커서 사람 팔뚝만할 정도였다. 작은 전쟁에서 승리한 그의 표정에서는 기쁨이 묻어났다. 전쟁에서 패배한 물고기는 바닥에서 몸부림쳤고, 낚시꾼은 잠시 후 바늘을 뺐고, 물고기의 몸부림도 잦아들었다. 어망에 담겨졌고, 낚시꾼은 이내 다시 바다를 응시했다. 이제 죽게 된 물고기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려는 찰라. 회로 먹으면 참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인하게도. 소주 한 잔까지 더해지면.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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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를 따라서 내려가다 마주한 어느 해수욕장은 텅 비어 있었다. 저 끝까지 이어진 해변에 나 혼자있는 느낌. 바닷가에 앉았고. 바다소리를 들었고.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알랭드 보통의 책이 생각났다. 내가 기대했던 동해의 바다와 내가 보고 있는 이 바다는 얼마나 비슷할까. 바다를 보면 정말 마음을 비울 수 있었을까? 사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문득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까라는 마음을 잠시 먹었다가. 조금 더 달려보기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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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왜 가게 됐는지 모르겠다. 사실 소심함 때문이였을 것이다. 아주 큰 전함(군함)을 봤고. 뭔가 싶어서 주차장으로 접어들었다. 그냥 잠깐 쉬려는 생각에. 그때 관리하는 사람이 다가와서 입장료와 주차비가 합쳐서 3천원이라고 했다. 그냥 나왔으면 됐겠지만, 주저하다 돈을 내밀었고, 결국 구경을 해야했다. 아주 많은 가족단위의 관광객에 묻혀서 전함을 구경했고. 자꾸만 내가 들고 있는 이 DSLR이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은 아무도 내게 신경을 안 썼지만, 난 계속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을거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참을 열심히 구경하다보니. 문득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내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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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다. 여행이 만족스러우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면 여행이 좀 재미없더라도 뭔가 얻은 느낌이고, 음식이 맛이 없으면 여행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했다. 그런데 혼자 무언가를 할 때 가장 힘든건 밥을 먹는 일이다. 휴게소의 음식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지만 혼자서 무언가 먹기에는 제격이다. 혼자인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휴게소 음식은 먹기가 싫었다. 여행이 만족스러우려면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마치 주문처럼 느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아이폰으로 검색을 했다. 봉평에서는 메밀로 만든 막국수(현대막국수)를 먹었고. 동해에 이르러서는 곰치국(신동식당)을 먹었다. 다른 음식도 먹었는데. 사진으로 찍지 않은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흐린 날씨와 저녁에 예정된 월드컵 경기 탓인지 어느 곳이나 한산했다. 주문한지 한참이 지나 나온 막국수는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양이였다. 문득 옆의 테이블을 보니 내 것의 2/3 정도의 양. 혼자 여행하고 있는 낯선이에 대한 배려였는지, 내가 든 카메라를 보고 혹시 홍보를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고마운 마음이였고. 배가 불러서 터질 것 같은데도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곰치국은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였다. 일반적인 생선을 넣고 만드는 매운탕과 달리. 곰치국은 곰치라는 생선과 김치를 넣어서 끓인다. 곰치의 살은 아주 연해서 흐물흐물할 정도였다. 씹는게 아니라 그냥 녹아서 넘어가는 느낌. 특이한 맛이였다. 곰치국을 먹고 나오니 날씨가 어둑어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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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를 정하던지, 돌아가던지 결정을 해야했다. 돈은 아직 꽤 많이 남아있었고. 여행이 좀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카지노’가 떠올랐다. 시동을 걸고 강원랜드로 향했다. 카지노 안은 정말 사람이 많았다. 밖은 월드컵이 한참이였지만. 검색대를 통과해야 갈 수 있는 카지노 내부는 완전 다른 세계였다. 카지노가 있는 호텔의 잔디밭에는 지역 주민과 관광객을 위해 설치한 대형 스크린과 응원전이 한참이였는데. 안은 기계나 딜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한참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다가. 마침내 기계 한 곳에 앉았다. 만원짜리를 넣었고.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자리를 옮겨 돈을 칩으로 바꾸고. 룰렛을 했다. 룰렛은 영화나 드라마에 가끔 등장하는 게임인데. 칸 마다 번호가 적혀있고 구슬을 돌려서 어떤 숫자에 들어갈지를 맞추는 게임이다. 처음에 한 판을 졌다가. 크게 걸었던 두 번째 판에서 이겼다. 잠시후 내가 처음 가졌던 돈보다 몇 배 많은 돈을 가지게 되자.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비우지 못한,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던 고민들이 이내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결국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였던거 같다. 그냥 다른 더 중요한 것으로 채워지면 이전의 고민은 덜 중요해지고. 그러면 잊게 되는. 그 뿐이다.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돈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리를 옮겨가면 블랙잭(카드 게임)과 다이사이(주사위 게임)를 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난 뒤에 내가 목표했던 금액을 모두 잃었다. 도박에 소질이 없어서인지. 중독 유전자가 부족한 탓인지. 재밌긴 했지만 중독이 될거 같진 않았다. 애초에 확률게임(물론 블랙잭 같은 게임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이라면. 돈이 무한대로 많은 딜러에게 유리할테니까. 엄청난 인파로 카지노 부근의 주차장이 꽉 차 있던 탓에. 차를 주차해놓은 꼭데기 주차장까지는 셔틀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새벽 시간이였고. 셔틀 버스에는 세명의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사실 어느 시골 동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에 가까우셨는데.
 
대화가 이랬다. 한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만원짜리를 찾았다. 할머니는 카지노에 들어갈 때 삼십만원을 가졌던 모양이다. 카지노 안의 어떤 사람들은 몇 백만원은 족히 될 칩을 들고 있기도 했지만, 그 할머니에게 삼십만원은 분명 꽤 큰 돈이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기계와 게임을 했고, 이내 모든 돈을 잃었다. 다행이라면 주머니 속에 있는 만원짜리 한장을 찾지 못해서 만원이 남았던 것이다. 다른 할머니들은 웃으면서 농담을 건냈다. 웃고 있었지만,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가진 돈을 모두 잃고 새벽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세 할머니의 얼굴 가득 허탈감이 느껴졌다. 문득 기분이 짠해졌다.
 
 
혼자 떠난 주말 여행 이야기 끝.
아래는 동해의 바다소리.